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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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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9 -잘 산다는 게 참 힘든거다.어미로 부터 전화가 와서. 잘 살고 있냐? 라 묻는 말에 도대체 뭐라 대답해야할지 난감이 그득하다. 잘 살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못 산다고 하면 얼마나 당신은 상처받을런지. 알고 있으니 괴롭다. 요즘은 좋아하는 카레도 안 먹게 된다. 속이 버겁다. -수줍은 꽃이 좋다 먼 발치에서 나를 외면하지 않는 꽃이 좋다그걸 발견하는 나의 여백을이젠 사랑해도 되겠지 빈 곳에 빈 집에 빈 종이에 나는 무언가를 쓰겠지 매일 -영화보고 싶다영화 보고 싶다는 마음은 큰데막상보려는 순간까지가 힘들어
남매 남매 / 비 갠 날 걷다 보면 소년이 고인 물속을 바라보고 괜찮냐 새끼야?라고 묻는 건 소년의 누나다 더러워진 교복, 누나 냄새나 소년의 뒷걸음질에 누나는 손날로 동생을 혼내준다싸운 거냐? 동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꽥 소리 지르고 오줌이라도 튄 것처럼 불쾌한 얼굴로 누나는이젠 주먹을 쥔다 살려다 그랬다 새끼야누나는 자주 살기 위해 옷을 더럽혔다소년이 물어도 누나는 씨발 씨발 거리면서교복을 손빨래한다운동장 흙은 애새끼들의 땀과 침, 흘린 콜라 같은 게 섞여 있으니까 십이 년 된 통돌이 세탁기로는 지울 수 없었다그러니 손빨래한다퉁퉁 부은 손등에 누런 거품이 옮겨붙는다누나 내가 할까됐다 꺼져라 내 몫이다소년은 하드를 입에 물고 문지방에 앉아서 누나를 본다고군분투하는 인간은 저렇게 구부러진 몸으로 소름 끼치는 안..
일기 0008 -미역국을 먹다가 왜 이렇게 짭냐 싶고알고 보니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눈물 흘리는 어미 때문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이파리를 말려서 보내보았어편지지를 세 번 접어 그 사이에 들어있는 녹 빛의 손깃털보다 부드럽다지 그 언젠가가 되면티브이를 보던 어미가 내게 저 주인공이 왜 울고 있냐고 줄거리를 물어보는 날이 오면내일 또 같은 것을 묻고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화면 속 슬픔에 대해 묻는 날이 오게되면그제서야 나는 어미의 생일 때마다 울겠지내가 울어서 주인공은 이제 울지 않아도 되거든요농담 섞어가며 조금 짠 미역국을 어미의 밥상에올려놓고 나는 물끄러미 어미의 주름진 입술이 여닫는 걸 보고맛있어?라고 물으면 어미는 고개 끄덕이며 이제 가르칠 게 없네 하고나는 고개 숙인 채 내일은 좀 어설픈 맛을 내겠노라 다짐..
독백 독백 고결을 위해 싸운 사람을 위해 쓰지 못했다어제 부러뜨린 손가락은 오늘 내 눈을 팠고그래, 나는 다 나았다다 괜찮아버렸어왜 고통은 백반 정식처럼 일상적인 게 되었는가형이 무섭다선배가 귀찮다노점상에게 욕을 들었다죽은 동생이 싫다나는 내가 더럽다양치를 하며 터져 나오는 것이 차라리악몽마다 꽉 다물던 허물어진 잇몸의 피였으면그래, 그게 차라리 나았을 테지울음이 먼저다일발 장전한 욕질 끝에 바라본가족사진 속에는 어린 내가 빨간 볼을 하며 웃고기억에도 없는 첫눈이젠벌레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 나는미지근한 식은땀을 흘리며 약도를 그리고거기 끝에는 가지 마라벌레의 언질예술가 하나가 뛰어내린 자리전공은 예술이고 희망은 자살이라지21세기가 되어도 진화하지 않는 변명들 오늘 밤은 손가락 두 개를 부러뜨리자 변명이 모자라..
당신과 나의 풍경 당신과 나의 풍경 / 같이 가자마음을 잘라서 야금야금 먹은 시절이게 맛도 없는데 우울의 맛이니까, 하고 동의했던 유년부서뜨린 레고 조립 청바지 얼룩이 물든 노란 수건그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주던 나의 어머니당신, 주름진 손 고맙지만이제 주름에 감히 감사를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희생은 꽃 피는 것이 아니란다당신, 물망초를 보며 누굴 기억하는 건가요같이 가자, 우리의 당신마음을 자르면 자른 만큼 솔직하게 아파할 수 있도록창문가에 앉아 읽은 시제목은 몰라도 되어요그저 당신은 평온한 상처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읽어주세요나는 듣겠습니다고통스러워하며 당신을 온통 사랑하면서
일기 0007 -만약, 그 언젠가 나도 책을 만들게 된다면"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라고 지어볼까 싶다. -최대한, 거짓을 도려내고 잔상을 따라가지 말자아름다운 건 손에 잡히지 말아야 하는 것 -요즘은 온통 카레카레. 카레카레카레로 노래 만들고 싶어. 흥겹게 좋아하는 걸 위해주고 싶어. -화분 몇 개 사와야지. 보듬아주면서 꽃피지 않아도 좋으니 좋아한다고.그래서 더욱 아낀다고 말해야지.
아래, 흔들리는 아래, 흔들리는 침대 밑의 머리카락 뭉치. 치워도 치워도 자라는 터럭들. 걸리적거리는 삶. 뭉텅이로 찾아오는 검은 실, 이끌려온 불행. 춤을 추다가 멈추는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프탈렌이 언제 이렇게 녹아내렸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 슬픔을 떠나보내는 것을 일과처럼 하면서 나는 자주 침대 아래를 바라보았지. 어머니, 불현듯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적어보지만. 난 정말 당신으로부터 태어난 건가요. 당신이 자주 내게 말했었죠. 너는 나를 슬프게 만드는구나. 떠난 보낸 슬픔이 어머니에게 도착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는 찾아뵐 수 없었어요. 전화로, 뚝뚝 흘리는 미련은. 눈물이라 하지 않겠습니다. 우는 거니?라는 질문에 보이지 않는 도리질을 하고. 나는 침대 밑으로 들어가 훌쩍입니다. 서러..
투명 투명 / 바람의 통로인 방 안에서 불안한 냄새를 띄워보낸다작은 배젖는 것이 운명인 작고 파란 배옷장을 연다면 기민한 취향이 드러나지무채색 드레스는 경고실크 가운은 죄를 짓기 전 입는 것옆집이 신경 쓰여 자꾸 창문가에 서 있는 A에게과일 과도를 선물한다차와 부딪힌 고양이는 가끔 만나던 아이칫,이라 붙인 이름나를 볼 때마다 재채기하던 아이 바람이 정색하지 않는 계절 방 안에서 춤을 추는 두 발작은 발이 바닥에 미끄러질 때마다 빙고! 빙고! 거리고불안이 나를 진단하지 않도록또 흘러들어오는 바람에속눈썹 하나를 실려보낸다0.005그램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나는 빙고, 빙고, 춤을 추며배웅한다 늦잠이 없는 아침작은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무사히, 오늘도 나의 영혼이 부푼다 칫 툇마루 정원에 놀러 온 칫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