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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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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5 -구석구석 치우며 닦고. 현관까지 닦으며 주말 동동 떠다녔다. 뭐가 취미가 필요해. 시간을 버틸 기댈 것이 필요해. -마음에 꼭 드는 테이블을 사서 하루종일 쳐다보았다. 좋음이 넘쳐난다. -우스운 글은 쓰고싶지 않은데 차암 어렵지. 쓰면 쓸수록 우스워서 말이야. 난폭하게 변하네. 팔을 휘두르니 내가 다치고 말아. -재미없는 티브이 프로들. 웃음에도 트렌드가 있어서 난 따라가질 못하는 거겠지. 예전에는 아빠랑 데굴데굴,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배 붙잡고 웃느라 정신없었는데 요즘은 그런게 없다. 내가 커버린걸까, 덜 순수해진걸까, 많은 것이 불편하게 되어버린걸까.
청결한 형 청결한 형 ㅡ 말씨가 부드러운 연두부 같은 형이 조곤조곤, 욕을 한다 왜 인지 모르겠어 자고 일어나니 화가 마구 났어 형의 불그레한 얼굴 블이 휩쓸고 간 벌거숭이산처럼, 터럭이 뽑혀 소름이 돋은 둔부처럼 형, 하고 동생은 형을 부른다 어느 때보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은 어제 먹은 토스트로 하자 딱딱했던 빵을 억지로 다시 익혀 질겅질겅 씹는다 형제는 잇몸이 튼튼해지고 어금니에 걸린 빵조각을 혀로 긁어내던 형은, 어제 회사에서 잘렸어 오늘 알바라도 알아봐야 해 질겅질겅, 오케이. 동생은 짜고 단 식빵을 끝까지 해치운다 뭐라도 해치우고 싶어 뭐라도 목을 조르고 싶어 형이 한 잠꼬대는 알려주지 말아야지 동생은 사려 깊어서 형의 화를 들쑤시지 않는다 이건 부모의 싸움으로부터, 어른의 조소로부터, 아..
미러 미러 ㅡ 거울 속 나를 끄집어내 주세요 저런 웃음 난 지은 적 없습니다 근육이 주름 아래서 몸뚱이를 뒤틀고 있어요 웃음소리가 비명소리 같은 건 착각이 아니겠지요 거울 속 나는 실수 한 적 없는 종 실패한 적 없는 생 냉수에 젖은 손이 바들거리고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건가요 나를 들여다보는 침묵은 소란이라는 것을 해쓱한 뺨이 울렁거리며 숨을 토해냅니다 호흡하는 법 우는 법 주먹을 휘두르는 법 모로 누워 잠자리를 바꾸는 법 을 잊어버렸어요 오로지 남아버린 건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짓뿐 거울 속, 저 새끼를 제발 끄집어내주세요 내가 썩어 푸르죽죽 해지기 전에 문드러진 형체로 내가 나를 흉내 내기 전에 ㅡ
애정욕구 애정욕구 ㅡ 미끄럼틀을 탔잖아 나보다 먼저 네가 내려갔어 나를 잡아주려고 떨어지는 나를 받아내 보려는 저 팔 튼튼하지 않는 팔뚝 노오란 끼 나는 손바닥 새끼손가락은 어쨌어? 너는 고개를 흔들고 몰라, 형이 깨물었어 네 형 뱃속에 있을 새끼손가락 그러게 약속을 지키라고 했잖아 비난에도 너는 웃고 어서 너도 떨어져 희미하게 떨리는 너의 팔과 몸 뱃속이 꼬여서 요즘은 포카리만 마셔서 그래 희멀건 혀를 내밀며 너는 자랑을 하고 나는 미끄럼틀 앞에 선다 쪼그리고 앉아버려서 보라색 팬티가 보여버리고 이거 엄마 거야 왜 엄마 거를 입어 어른이 되고 싶었으니까 너는 인정한다 자, 어서 떨어져 받아줄 거니? 세차게 끄덕이는 머리통 가마에 앉은 피딱지 그래서 난 너를 믿지 나는 미끄러진다 쉬이잉 보라색 직물 너머 달궈진 ..
일기 0014 나를 만나러 오는 건가요
혀의 생존 혀의 생존 ㅡ 혀를 씹었는데 혀 맛이 아닌 어제 욕지거리한 인간의 살덩이 맛이 난다는 것 퉷 퉷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지 냉수로 세수하지만 혓바닥은 가지런히 누워있지 않아서 또 깨물고 지난주 욕 한 부모와 잔돈을 훔친 마트 캐셔와 조는 부하직원과 문을 쾅쾅 닫는 802호 여자와 버스 좌석에 앉아 차창에 대가리 박는 노인과어항에서 튀어나와 저 멀리 구두 밑으로 들어간 열대어와 그걸 밟고 이딴 거 키우지 말라고 말하는 당신을 욕한다 혀가 성할 리 없다종이컵 끝을 씹어대는 것처럼혀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씹고절단하려 힘내는데 다만, 진짜 죽으러 한 p의 손을 꼭 잡고서 은밀히 말하지 그럴 땐 네 혀를 씹어봐사이키델릭한 음악 속뿌리부터 몸을 흔드는 혀를비 한줌 얻어먹으려 하는 환형동물 같은 혀를너의 근거너의..
나는 기쁨을 나열하네 나는 기쁨을 나열하네 냉동고에 꺼낸 네모난 얼음 주머니에 있던 구겨진 영수증 영수증에 그린 당신의 얼굴 예쁘게 잘린 엄지손톱 싱싱하게 도착한 시골의 채소 찐 감자를 으깬 아카시아 나무 접시 편지들 전하지 못한 편지 또한 이름 없는 쪽지 너라서 그랬어.라는 문장 온종일 나는 기쁨을 나열하네 입속, 미열로 얼음을 녹이며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이 오면 물어봐야지 문장 옆에 누워 당신을 웃게 해야지
소년 콜 소년 콜 오지 마요 버렸잖아 잔인한 것도 모르게 버렸잖아 말소된 사랑에 속게 만들었어요 어미에게 전화를 하다가 그쪽에서 먼저 끊어버렸지 미안 분명히 그런 말을 했겠지 소년은 믿는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겠지 싶어서 필요 없는 새끼는 둥지에서 밀어내는 짐승을 배우고 나서 소년은 교과서를 오려버린다 이러면 안 돼요 선생님, 새끼를 버리는 어미는 그래도 되나요? 그래도 교과서를 오려버리면 안 돼 선생님, 선생님도 새끼를 버리려고 했었나요? 막지 말아요. 쉬는 시간 동안 걸레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든 벌을 선다 바들거리는 팔 바들거리는... 현관문 밖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어미가 떨면서 소년의 뺨을 만져보았지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오늘 소년은 싸웠습니다 어미 없는 새끼! 아이의 부재는 왜 남이 먼저 알아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