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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봉지



검은, 비닐봉지



부름이 적어서 그런 건가. 하늘에 떠있는 한 점은 검은 비닐봉지의 전언. 너는 누가 불러서 저렇게 떠다니는 거야. 저승 나비처럼 팔랑 팔랑거리면서. 일기를 안 쓴지 오래다. 갈수록 기록의 표정이 어두워졌기에. 이를 악다물고 있듯, 단어 하나하나 빼곡하게 괴로움을 말했다. 짓이겨진 종이. 찔러 죽일 듯한 검은 펜. 일기를 쓰면 쓸수록 심장이 망가졌다. 노을을 볼 때마다 온몸의 피가 심장으로 돌진했다. 살고 있다고 스스로 증명하기 위하여. 은행나무가 즐비한 길가. 꼬마는 어린이집에서 수수깡으로 만든 집을 들고 간다. 엄마, 여기서 엄마랑 나랑 사는 거야. 두 손으로 보금자리를 들고 있다. 생일 케이크처럼. 더없이 소중하게. 엄마라는 당신은 행복하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좋은 날. 꼬마의 간질이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아빠도 함께 살아야지. 외로울 거야. 작고 둥근 머리에 던져진 잎사귀를 떼려 하지만 당신은 손길을 멈춘다. 아빠는 언제라도 놀러 오라고 문은 안 만들었어. 하늘에서 있다가 마음대로 놀러 오라고. 당신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리라. 참기 위해. 참았던 것을 또 참기 위해. 아빠가 초인종을 누르는 걸 밤새도록 기다린 그날 이후. 꼬마는 묵묵히 서있는 철제 현관문을 증오했으리라. 심호흡을 하고 당신은 등을 편다. 그래, 잘했어. 좋은 생각이야. 잎을 떼어내며 꼬마를 뒤따라 걷는다. 나는 천천히 저들과 하늘을 번갈아 본다. 부름이 적어서 놓은 일기를 써볼까 싶다. 아직도 펄럭거리는 비닐봉지. 꼬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일그러뜨린 현관문 같기도 하고. 꼬마를 바라보던 당신의 얼굴 같기도 하고. 대신 울음 터트린 나의 심장이기도 해서. 아직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어쩌면 저 영혼은, 비닐봉지는, 까만색은 오랫동안 쓰지 못한 일기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나는 바라본다.

노을을 건너는 저 형체를, 

마실 다녀온 영혼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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