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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홈 시스템



비디오 홈 시스템


비디오를 되감기 한다. 뒤로, 뒤로, 뒤로. 아니지 앞으로 가는 것인가. 앞과 뒤에 끼어버린 필름. 플레이 되는 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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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니다, 선생님. 모든 과목마다 하얗게 쥔 주먹을 보였어. 종례시간이 될 때까지, 손을 들어도 나는 발표할 수 없었지. 오줌을 쌌다. 이건 발표가 아니라 발악이었는데. 축축한 바지는 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집에 들어간 날. 어미의 표정. 팬티가 왜 그렇게 누렇냐. 중얼거리던 어미를 보고 난 처음 "죄송합니다."라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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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머리를 밀어버리고 손을 들었다. 한여름 쨍쨍한 햇빛이 아이들의 하얀 실내화 위로 떨어지던 날. 나는 대사를 읊듯 선생님을 부르고. 큰 목소리로. 우람해진 얼굴로 이마를 빛내면서 계속 시도했다. 땀은 새로 산 바지까지 적신다. 또 팬티 바람으로 현관을 열었다. 운동화 고무창을 붙이던 어미는 세상 무너지는 표정으로 말했지. 어서, 밥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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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자라기 마련이야. 까끌까끌한 머리통을 문지르며 룡이 말했지. 집 나간 아비가 돌아오지 않아도 잘 자라는 우리처럼. 잘라도, 잘라도. 바르게 성장한 세포는 결국 죽는 것. 생명은 어기적거리며 관을 향하는 것. 자위 좀 그만해. 룡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너무 빨리 자라면 안 되니까. 비디오가 되감기를 끝낸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이 시작하고 나는 손을 든다. 번쩍, 별똥별처럼. 반짝거리는 이마를 빛내며. 저요, 저요! 내가 여기, 있어요. 룡과 함께 뿌리를 흔들며. 우리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저요,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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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번을 되감기 하고, 노이즈가 비처럼 흘러내리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름이 불리고 싶어, 손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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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는 발표력이 뛰어난 아이.

어여쁘게 일그러진 얼굴.

키득거리며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배꼽에 낀 때가 떨어질 만큼 굴렀지

우리의 방식, 우리의 잠재력.

나는 벌써 머리카락이 손가락 마디만큼 자랐다. 룡이 바리깡을 들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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