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 리스트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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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놀이
- 요즘 일렁거린다. 파도가 된 기분. 밤이 포말처럼 가볍다. 부서지기 쉬워지고 흐트러지는 것이 우선 되는. 좋다. 나약한 것이란. 고양이 네 마리가 엉켜 가로수 아래서 잠들어 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배를 바라보며 나는 평온해지고. 편의점에서 산 캐러멜을 입 속에 넣는다. 달달해진 입속. 풍경이 정물에 가까워지면 아주 약간의 외로움을 느끼며 집으로 간다. 발걸음마다 몸이 들썩인다. 파도처럼 걷는다. 범람이 일상. 오늘 일기는 웃는 표정만 그려놓아야지. 대문 옆 선술집의 웃음소리가 어깨에 먼지처럼 붙는다. 밤처럼, 포말처럼, 흐트러지기 쉬운 것. 나약하므로 새벽을 호위하는 것들. 노트에 적힌 고백 곁으로 데려가야지. 나의 바다를 보여줘야지. -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미래가 좀 더 반짝거린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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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같은 결이 되어
너를 만나러 간다, 라는 말이 얼마나 다정한 것인지. 바람 혹은 구름과 닮은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나는 자주 기대곤 했다. 공원 산책처럼 살자 느릿느릿 걸음 옮길 때 따라오는 옅은 그림자들은 이제 무서워하지 말자 발자국 따라 걷기도 하고 발자국 덮어가며 걷기도 하고 오늘은 삼십 분이 되기도 하고 내일은 두 시간이 되는 것처럼 비 오는 날엔 취향 가득한 우산 쓰고서 숲 비린내 맡으며 들뜬 피부를 겹치기도 하면서 불러도, 애인의 이름은 살짝 지워져서 누굴 부르는지 몰라 날 불렀냐며 되묻는, 빗소리 사이에서 무분별한 대화를 하는 것처럼 곁에 둔 체온에 심장이 울긋불긋한 잎사귀처럼 따스해지는 것처럼 나를 만나러 오는 네게 나는 어김없이 물들어 서로에게 기댄 말과 어깨와 시간은 이제 같은 결이 되어버리고 주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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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21
1.살면서 찢어버리고, 죽이고 싶은 기억과 사람, 자신이 있지. 그럼에도 웃으면서 오늘을 방치하는 사람은 찢는 것을 성공한 사람이고. 그렇기에 웃으면서 울 준비를 하는 사람은 찢어내지 못하고 구긴 자국 남은 걸 마음에 품은 사람이고. 2.나는 과연. 3.숨쉬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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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20
1.죽고 싶어. 알고보면 이미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2.해야할 일 이 많다. 견뎌야 할 것도 많다. 운만큼 떠내려갈 수 있다면 계속 울 수 있겠지. 하지만 바닥만 축축해진다. 손을 들어도 나만 발표할 수 없는 꿈을 꾸고 모두가 부르는 합창에서 나만 목소리가 안나오는 꿈도 꾸고. 먹먹하다. 3.8월. 정말 중요한... 알아봐야 할 것이 몇몇 있다. 부지런히 견고해져야해.밀크티를 마시다가도 죽고 싶다. 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떠다니지만. 마시고 있는 밀크티가 좀 더 진했으면 좋겠어. 내일 마트에서 그 브랜드를 사야지. 하는 생각이 좀 더 크고 무겁도록 해야한다. 노를 저어가듯, 축축한 바닥을 기어가야 한다. 운다고해서 별일 있는 것이 아니듯. 4.책이 왔다. BL만화 한 권과 시집 세 권. 달달한 만화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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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9
당신들은 너무 착하다 너무도 아픈 것이 잘 여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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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8
- 고백 우리, 무너지기 전에 안아버려요기댈 수 있는 문장이 되어버리자구요서로가 서로를 향한 방향으로 -기댈 수 없을만큼, 사라진 지면에서 당신의 선택은 어쩔 수 없었겠죠이해되기에 슬픈 하루 -그래서 소중한 것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해심연이 되는 것 모두가 어둠 -주말 내내 덥더라. 찐득한 몸으로 방바닥 굴러다니면서 밥 먹고, 애니보고, 창문 보고, 물 마시고. 숨 쉬고.그렇게 살고. 더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열심히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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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7
-마음이 오고가고 싶어너무 꼭꼭 담아두고 살았지사랑하고 싶어애정하고 싶어고요하지 않고 싶어사르르 사라지는 것이 예쁘다고 말하고 싶어 눈비눗방울속눈썹손부채 바람살가운 부름 어여쁘다, 마음을 당신에게 조금은 소란스럽게 말하고 싶어 - 여름이 진짜 바짝바짝 거린다.매미는 아직인가. 울음이 여름이길 바란다.울음이 멈추면 여름도 멈추길 바란다. -아이 손을 꼭 잡고 가는 당신아.촉촉해진 눈가만큼 젖은 손바닥도 따스하다는 걸 아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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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6
신나는 노래가 배경음으로 깔린 영화를 보고어제 먹은 당근 케이크가 맛있었어 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지색색의 팬티를 접어 서랍 속에 가지런히 놓고한번 색깔별로 다시 재정리하고서 흐믓해하는 주말 그럼에도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생각을 지니자 나는 정말 부러졌다는 것 내게 결이 있다면 쓰러지고 부러져 생긴 상처일꺼야 따위 아무 소용도 없이 창백한 우울의 밤이 지나가고 있지 -악의없는 인간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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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5
-구석구석 치우며 닦고. 현관까지 닦으며 주말 동동 떠다녔다. 뭐가 취미가 필요해. 시간을 버틸 기댈 것이 필요해. -마음에 꼭 드는 테이블을 사서 하루종일 쳐다보았다. 좋음이 넘쳐난다. -우스운 글은 쓰고싶지 않은데 차암 어렵지. 쓰면 쓸수록 우스워서 말이야. 난폭하게 변하네. 팔을 휘두르니 내가 다치고 말아. -재미없는 티브이 프로들. 웃음에도 트렌드가 있어서 난 따라가질 못하는 거겠지. 예전에는 아빠랑 데굴데굴,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배 붙잡고 웃느라 정신없었는데 요즘은 그런게 없다. 내가 커버린걸까, 덜 순수해진걸까, 많은 것이 불편하게 되어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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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한 형
청결한 형 ㅡ 말씨가 부드러운 연두부 같은 형이 조곤조곤, 욕을 한다 왜 인지 모르겠어 자고 일어나니 화가 마구 났어 형의 불그레한 얼굴 블이 휩쓸고 간 벌거숭이산처럼, 터럭이 뽑혀 소름이 돋은 둔부처럼 형, 하고 동생은 형을 부른다 어느 때보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은 어제 먹은 토스트로 하자 딱딱했던 빵을 억지로 다시 익혀 질겅질겅 씹는다 형제는 잇몸이 튼튼해지고 어금니에 걸린 빵조각을 혀로 긁어내던 형은, 어제 회사에서 잘렸어 오늘 알바라도 알아봐야 해 질겅질겅, 오케이. 동생은 짜고 단 식빵을 끝까지 해치운다 뭐라도 해치우고 싶어 뭐라도 목을 조르고 싶어 형이 한 잠꼬대는 알려주지 말아야지 동생은 사려 깊어서 형의 화를 들쑤시지 않는다 이건 부모의 싸움으로부터, 어른의 조소로부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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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미러 ㅡ 거울 속 나를 끄집어내 주세요 저런 웃음 난 지은 적 없습니다 근육이 주름 아래서 몸뚱이를 뒤틀고 있어요 웃음소리가 비명소리 같은 건 착각이 아니겠지요 거울 속 나는 실수 한 적 없는 종 실패한 적 없는 생 냉수에 젖은 손이 바들거리고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건가요 나를 들여다보는 침묵은 소란이라는 것을 해쓱한 뺨이 울렁거리며 숨을 토해냅니다 호흡하는 법 우는 법 주먹을 휘두르는 법 모로 누워 잠자리를 바꾸는 법 을 잊어버렸어요 오로지 남아버린 건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짓뿐 거울 속, 저 새끼를 제발 끄집어내주세요 내가 썩어 푸르죽죽 해지기 전에 문드러진 형체로 내가 나를 흉내 내기 전에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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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욕구
애정욕구 ㅡ 미끄럼틀을 탔잖아 나보다 먼저 네가 내려갔어 나를 잡아주려고 떨어지는 나를 받아내 보려는 저 팔 튼튼하지 않는 팔뚝 노오란 끼 나는 손바닥 새끼손가락은 어쨌어? 너는 고개를 흔들고 몰라, 형이 깨물었어 네 형 뱃속에 있을 새끼손가락 그러게 약속을 지키라고 했잖아 비난에도 너는 웃고 어서 너도 떨어져 희미하게 떨리는 너의 팔과 몸 뱃속이 꼬여서 요즘은 포카리만 마셔서 그래 희멀건 혀를 내밀며 너는 자랑을 하고 나는 미끄럼틀 앞에 선다 쪼그리고 앉아버려서 보라색 팬티가 보여버리고 이거 엄마 거야 왜 엄마 거를 입어 어른이 되고 싶었으니까 너는 인정한다 자, 어서 떨어져 받아줄 거니? 세차게 끄덕이는 머리통 가마에 앉은 피딱지 그래서 난 너를 믿지 나는 미끄러진다 쉬이잉 보라색 직물 너머 달궈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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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4
나를 만나러 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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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생존
혀의 생존 ㅡ 혀를 씹었는데 혀 맛이 아닌 어제 욕지거리한 인간의 살덩이 맛이 난다는 것 퉷 퉷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지 냉수로 세수하지만 혓바닥은 가지런히 누워있지 않아서 또 깨물고 지난주 욕 한 부모와 잔돈을 훔친 마트 캐셔와 조는 부하직원과 문을 쾅쾅 닫는 802호 여자와 버스 좌석에 앉아 차창에 대가리 박는 노인과어항에서 튀어나와 저 멀리 구두 밑으로 들어간 열대어와 그걸 밟고 이딴 거 키우지 말라고 말하는 당신을 욕한다 혀가 성할 리 없다종이컵 끝을 씹어대는 것처럼혀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씹고절단하려 힘내는데 다만, 진짜 죽으러 한 p의 손을 꼭 잡고서 은밀히 말하지 그럴 땐 네 혀를 씹어봐사이키델릭한 음악 속뿌리부터 몸을 흔드는 혀를비 한줌 얻어먹으려 하는 환형동물 같은 혀를너의 근거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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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쁨을 나열하네
나는 기쁨을 나열하네 냉동고에 꺼낸 네모난 얼음 주머니에 있던 구겨진 영수증 영수증에 그린 당신의 얼굴 예쁘게 잘린 엄지손톱 싱싱하게 도착한 시골의 채소 찐 감자를 으깬 아카시아 나무 접시 편지들 전하지 못한 편지 또한 이름 없는 쪽지 너라서 그랬어.라는 문장 온종일 나는 기쁨을 나열하네 입속, 미열로 얼음을 녹이며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이 오면 물어봐야지 문장 옆에 누워 당신을 웃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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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콜
소년 콜 오지 마요 버렸잖아 잔인한 것도 모르게 버렸잖아 말소된 사랑에 속게 만들었어요 어미에게 전화를 하다가 그쪽에서 먼저 끊어버렸지 미안 분명히 그런 말을 했겠지 소년은 믿는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겠지 싶어서 필요 없는 새끼는 둥지에서 밀어내는 짐승을 배우고 나서 소년은 교과서를 오려버린다 이러면 안 돼요 선생님, 새끼를 버리는 어미는 그래도 되나요? 그래도 교과서를 오려버리면 안 돼 선생님, 선생님도 새끼를 버리려고 했었나요? 막지 말아요. 쉬는 시간 동안 걸레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든 벌을 선다 바들거리는 팔 바들거리는... 현관문 밖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어미가 떨면서 소년의 뺨을 만져보았지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오늘 소년은 싸웠습니다 어미 없는 새끼! 아이의 부재는 왜 남이 먼저 알아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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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3
5월과 6월 사이 유난히 잦은 실패오리무중인 여름밤거리숨토마토와 토마토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오류모드그럼에도 다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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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일상
비교 일상 당신의 글과 나의 글이당신의 일상과 나의 일상이당신의 음료와 나의 음료가당신의 걸음과 나의 걸음이당신의 러브와 나의 러브가 노트북 화면 빛을 빌려 겨우 내 발을 찾는다이렇게 차가웠다니당신의 발은 나처럼 서늘하지 않겠지 당신을 사랑하다 보니 미워하게 되었지오래전부터 여름마다 찾아오는 습기를나의 눈가와 비교하며 애석해했었고당신의 눈가는 반짝거리는 빛의 알갱이만 있는 것이이젠 서러워 노트북 빛에 의지한 채 비척거리며싱크대 앞으로 걸어가지꺼내둔 보리차를 마시고 마시다가 이게 상한 건가 싶었고툭, 내뱉어 쓰디쓴내 질투가 썩어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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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봉지
검은, 비닐봉지 부름이 적어서 그런 건가. 하늘에 떠있는 한 점은 검은 비닐봉지의 전언. 너는 누가 불러서 저렇게 떠다니는 거야. 저승 나비처럼 팔랑 팔랑거리면서. 일기를 안 쓴지 오래다. 갈수록 기록의 표정이 어두워졌기에. 이를 악다물고 있듯, 단어 하나하나 빼곡하게 괴로움을 말했다. 짓이겨진 종이. 찔러 죽일 듯한 검은 펜. 일기를 쓰면 쓸수록 심장이 망가졌다. 노을을 볼 때마다 온몸의 피가 심장으로 돌진했다. 살고 있다고 스스로 증명하기 위하여. 은행나무가 즐비한 길가. 꼬마는 어린이집에서 수수깡으로 만든 집을 들고 간다. 엄마, 여기서 엄마랑 나랑 사는 거야. 두 손으로 보금자리를 들고 있다. 생일 케이크처럼. 더없이 소중하게. 엄마라는 당신은 행복하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좋은 날. 꼬마의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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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2
-둥근 것은 앞니로 뒷목을 물고, 눈으로 제 그림자의 뒷면을 볼 수 있는 것이라서. 무튼, 축구 쥑였다. 새벽에 민폐 가득 소리 질러버렸어. 오늘만큼은 좀 봐주세요. 보고 있는데 눈물이 왈칵 나려했다. 공에 두들겨 맞는 모습. PK 안 받으려 뒷짐지고 있는 처절한, 안타까운 모습. 그럼에도 몸을 던지는 선수들. 막막, 그렇다. 아등바등. 잘 하는데 뭔랄까, 짠했어. 그래서 더 골 넣고 나서 울어버렸지. 무튼2, 조온나아 까리했다. -스포츠는 좋다. 초딩 시절 미치겡이처럼 피구하던 내 유년도 생각나고, 웃음 지었고. 꼬물꼬물 공 던지던 시절. -늙었나.늙었지만. -한강. 책을 읽고 충격받아서 마음 끙끙 앓았던 작가가 최승자, 박민규, 김애란 님이었는데.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고나서 나는 뜻모를 감정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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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놓인 선분
얼굴에 놓인 선분 / 푸른 점이 거기 있다. 왜 거기 있냐라고 물으면 대답 않고 새벽녘처럼 번지기만 할 뿐. 너는 원래 그러한가 물어도 비명 없이 있는데. 푸른 점, 태어나자마자 얻은 별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더니 거기에 있다. 냉장고 앞, 아니면 세탁기 앞에서 그것도 아니면 소변 누고 있는 내 앞에 머문다. 둥글고 푸르뎅뎅한 점, 비 오는 날이면 작아지고 햇빛이 건실해지면 점도 튼튼해졌다. 비 오는 날보다 맑은 날씨에 동반자살한 사람이 많다는 뉴스를 보았고 점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저것은 퉁퉁 몸을 흔들며 괘념치 않았다. 오로지 거기에서 투웅 퉁. 떠나지 않고 내가 보이는 곳에 푸른색이 있을 뿐. 빠-안히 나를 지키는 우울. 내가 아닌 주인은 필요 없다며 고집하는 샘. 내게 묻는다. 담담한 목소리.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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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1
-최승자.최승자.이런 이름이라서 저런 글을 쓸 수 있는 건가요. -(최승자 시인의 글)/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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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10
-우습게 살아야 한다. 우습게. 주말에는 영화와 영화를 영화로. 비워야 사나, 채워야 사나. 뱃속은 그득해지지 말도록 하자. 그건 분명해. 빈곤이 삶이 되기에는 나는 아직 멀쩡하다지. 노력해야해. 꼬리를 흔드는 개. 토마토가 썩어가고 있다. 냉장고가 점점 비워지면 불안하다. 요즘은 채식 위주. 그래도 달걀은 먹어야지. 하루에 한 알. 차암, 죽지 않을라꼬. 버둥거린다. 매끼 우적우적 씹는다. -그들의 저녁. -그것이 알고싶다. 무섭다. 사람 새끼라는 것들이 죄다 허잡스럽다. -그럼에도. -꽃을 꺾지 않는 사람이 있고눈물 기꺼이 흘리며 고개 끄덕이는 사람이 있고무너지지 않으려 함께 손잡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아직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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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우는 시간
새벽은 우는 시간 / 청춘이 슬퍼지는 날 그때는 죽어버려야지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오늘 산 플라워 포스터는 벽이 아닌 천장에 붙였다수국이 가득한 착시로 잠결마다 행복해지고 즐거운 퇴비가 되자간결한 오염이 되자오늘부터 희망사항은 알맞게 썩는 것 짝꿍의 키스로부터나는 적절한 온도가 되고우리의 체취와 유머가 같은 종이 되면혀를 깨물어야지자장자장당신과 나의 놀음이 좋아얼얼해진 혀끝으로 지난밤의 신기루를 말하고어느덧 다 괜찮아지는 새벽의 도래설레는 망명이라 하자 어깨너머로 해가, 붉은빛이 떠오른다찬란한 썩음이단칸방에 놓인 표정들을껴안아버리고 우리의 우울을 좌지우지하는청춘의 소동 나는 잠시 저항을 멈춘다자, 이제 울음을 겨우 하는 시간뜨거운 몸뚱이 되어가열차게 썩는 외마디 유언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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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9
-잘 산다는 게 참 힘든거다.어미로 부터 전화가 와서. 잘 살고 있냐? 라 묻는 말에 도대체 뭐라 대답해야할지 난감이 그득하다. 잘 살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못 산다고 하면 얼마나 당신은 상처받을런지. 알고 있으니 괴롭다. 요즘은 좋아하는 카레도 안 먹게 된다. 속이 버겁다. -수줍은 꽃이 좋다 먼 발치에서 나를 외면하지 않는 꽃이 좋다그걸 발견하는 나의 여백을이젠 사랑해도 되겠지 빈 곳에 빈 집에 빈 종이에 나는 무언가를 쓰겠지 매일 -영화보고 싶다영화 보고 싶다는 마음은 큰데막상보려는 순간까지가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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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
남매 / 비 갠 날 걷다 보면 소년이 고인 물속을 바라보고 괜찮냐 새끼야?라고 묻는 건 소년의 누나다 더러워진 교복, 누나 냄새나 소년의 뒷걸음질에 누나는 손날로 동생을 혼내준다싸운 거냐? 동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꽥 소리 지르고 오줌이라도 튄 것처럼 불쾌한 얼굴로 누나는이젠 주먹을 쥔다 살려다 그랬다 새끼야누나는 자주 살기 위해 옷을 더럽혔다소년이 물어도 누나는 씨발 씨발 거리면서교복을 손빨래한다운동장 흙은 애새끼들의 땀과 침, 흘린 콜라 같은 게 섞여 있으니까 십이 년 된 통돌이 세탁기로는 지울 수 없었다그러니 손빨래한다퉁퉁 부은 손등에 누런 거품이 옮겨붙는다누나 내가 할까됐다 꺼져라 내 몫이다소년은 하드를 입에 물고 문지방에 앉아서 누나를 본다고군분투하는 인간은 저렇게 구부러진 몸으로 소름 끼치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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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8
-미역국을 먹다가 왜 이렇게 짭냐 싶고알고 보니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눈물 흘리는 어미 때문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이파리를 말려서 보내보았어편지지를 세 번 접어 그 사이에 들어있는 녹 빛의 손깃털보다 부드럽다지 그 언젠가가 되면티브이를 보던 어미가 내게 저 주인공이 왜 울고 있냐고 줄거리를 물어보는 날이 오면내일 또 같은 것을 묻고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화면 속 슬픔에 대해 묻는 날이 오게되면그제서야 나는 어미의 생일 때마다 울겠지내가 울어서 주인공은 이제 울지 않아도 되거든요농담 섞어가며 조금 짠 미역국을 어미의 밥상에올려놓고 나는 물끄러미 어미의 주름진 입술이 여닫는 걸 보고맛있어?라고 물으면 어미는 고개 끄덕이며 이제 가르칠 게 없네 하고나는 고개 숙인 채 내일은 좀 어설픈 맛을 내겠노라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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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독백 고결을 위해 싸운 사람을 위해 쓰지 못했다어제 부러뜨린 손가락은 오늘 내 눈을 팠고그래, 나는 다 나았다다 괜찮아버렸어왜 고통은 백반 정식처럼 일상적인 게 되었는가형이 무섭다선배가 귀찮다노점상에게 욕을 들었다죽은 동생이 싫다나는 내가 더럽다양치를 하며 터져 나오는 것이 차라리악몽마다 꽉 다물던 허물어진 잇몸의 피였으면그래, 그게 차라리 나았을 테지울음이 먼저다일발 장전한 욕질 끝에 바라본가족사진 속에는 어린 내가 빨간 볼을 하며 웃고기억에도 없는 첫눈이젠벌레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 나는미지근한 식은땀을 흘리며 약도를 그리고거기 끝에는 가지 마라벌레의 언질예술가 하나가 뛰어내린 자리전공은 예술이고 희망은 자살이라지21세기가 되어도 진화하지 않는 변명들 오늘 밤은 손가락 두 개를 부러뜨리자 변명이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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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풍경
당신과 나의 풍경 / 같이 가자마음을 잘라서 야금야금 먹은 시절이게 맛도 없는데 우울의 맛이니까, 하고 동의했던 유년부서뜨린 레고 조립 청바지 얼룩이 물든 노란 수건그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주던 나의 어머니당신, 주름진 손 고맙지만이제 주름에 감히 감사를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희생은 꽃 피는 것이 아니란다당신, 물망초를 보며 누굴 기억하는 건가요같이 가자, 우리의 당신마음을 자르면 자른 만큼 솔직하게 아파할 수 있도록창문가에 앉아 읽은 시제목은 몰라도 되어요그저 당신은 평온한 상처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읽어주세요나는 듣겠습니다고통스러워하며 당신을 온통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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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7
-만약, 그 언젠가 나도 책을 만들게 된다면"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라고 지어볼까 싶다. -최대한, 거짓을 도려내고 잔상을 따라가지 말자아름다운 건 손에 잡히지 말아야 하는 것 -요즘은 온통 카레카레. 카레카레카레로 노래 만들고 싶어. 흥겹게 좋아하는 걸 위해주고 싶어. -화분 몇 개 사와야지. 보듬아주면서 꽃피지 않아도 좋으니 좋아한다고.그래서 더욱 아낀다고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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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흔들리는
아래, 흔들리는 침대 밑의 머리카락 뭉치. 치워도 치워도 자라는 터럭들. 걸리적거리는 삶. 뭉텅이로 찾아오는 검은 실, 이끌려온 불행. 춤을 추다가 멈추는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프탈렌이 언제 이렇게 녹아내렸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 슬픔을 떠나보내는 것을 일과처럼 하면서 나는 자주 침대 아래를 바라보았지. 어머니, 불현듯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적어보지만. 난 정말 당신으로부터 태어난 건가요. 당신이 자주 내게 말했었죠. 너는 나를 슬프게 만드는구나. 떠난 보낸 슬픔이 어머니에게 도착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는 찾아뵐 수 없었어요. 전화로, 뚝뚝 흘리는 미련은. 눈물이라 하지 않겠습니다. 우는 거니?라는 질문에 보이지 않는 도리질을 하고. 나는 침대 밑으로 들어가 훌쩍입니다. 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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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투명 / 바람의 통로인 방 안에서 불안한 냄새를 띄워보낸다작은 배젖는 것이 운명인 작고 파란 배옷장을 연다면 기민한 취향이 드러나지무채색 드레스는 경고실크 가운은 죄를 짓기 전 입는 것옆집이 신경 쓰여 자꾸 창문가에 서 있는 A에게과일 과도를 선물한다차와 부딪힌 고양이는 가끔 만나던 아이칫,이라 붙인 이름나를 볼 때마다 재채기하던 아이 바람이 정색하지 않는 계절 방 안에서 춤을 추는 두 발작은 발이 바닥에 미끄러질 때마다 빙고! 빙고! 거리고불안이 나를 진단하지 않도록또 흘러들어오는 바람에속눈썹 하나를 실려보낸다0.005그램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나는 빙고, 빙고, 춤을 추며배웅한다 늦잠이 없는 아침작은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무사히, 오늘도 나의 영혼이 부푼다 칫 툇마루 정원에 놀러 온 칫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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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편지를 쓴다
나는 자주 편지를 쓴다 / 창문 없는 방 거울은 반품하고 벽지에 옮겨붙은 얼굴도 거부한 당신과의 소담에서 어쩌나 싶어, 이젠 소풍이 지겨워졌어. 봄 춘,을 쓰는 법도 잊어버렸어 건망증이 아니야 냉장고 속에서 반찬 그릇 아래 핸드폰을 발견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해프닝 검지로 가리킨 아네모네가 놀라서 꽃잎을 떨어뜨려 나를 꼴 뵈기 실어 그런 걸 테지 오늘은 화병 속에 날벌레를 떨어뜨렸어 그래, 난 점점 잔인해지고 있어 밤마다 입술과 눈썹이, 배꼽과 정강이가 잘게 잘게 찢기고 있지 험담을 할 때마다 종이를 찢는 사람을 알고 있어 그래, 너도 아는 사람 당신은 심드렁해진다 어제 사다 준 장난감이 시시해진 고약한 어린애처럼 바짝 자른 손톱에 연고가 말라붙어있고 나는 모른척한다 테이블 위에 두 손을 포개어 만든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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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6
요즘 날씨가 좋다. 아니 따뜻하다. 하늘은 흐리지만 기운이 오른다. 곧 짜증지수도 오를 테지. 그럼에도 서로 껴안으며 입김이 머무는 품 안에서 웃는다. 저들은 광장에서 웃을 수 있다. 요즘 좋은 것을 먹는다. 약 같은 게 아니라. 오로지 채소. 적당한 버터와 달큼한 조미료. 먹으면서, 씹고 열심히 뭉개고서 몸 안으로 집어넣는 일. 서랍 속에 괜찮은 옷가지를 넣어두듯이 안을 꾸민다. 나는 건강해질 것이다. 분명 조금이라도 아픔에 쉬이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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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라는 영원에
1초라는 영원에 테이블 위에 하얗게 새겨지는 빛과 창문의 무늬나도 그럴까요, 당신에게 반짝거리는 무늬로 새겨지는 것그늘에서도 나를 봐주세요울고 난 이불의 습기 속에서도 나를 봐주세요서러워하지 않고 먼지를 삼키며 모은내 애정을 통과한 무늬를, 당신의 손등에 닿게 해주세요그리고 그 위로, 아주 짧은 입맞춤을나의 모든 편안, 포기해도 좋으니 1초라도나의 애정을 쓰다듬어 주세요 커피가 아닌 바닐라 셰이크를 주문한 당신 손등에 닿았다 떨어지는 차가운 당신의 표면에 나는 흔들립니다 기꺼이 내가 있습니다 1초 속,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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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홈 시스템
비디오 홈 시스템 비디오를 되감기 한다. 뒤로, 뒤로, 뒤로. 아니지 앞으로 가는 것인가. 앞과 뒤에 끼어버린 필름. 플레이 되는 유년. -접니다, 선생님. 모든 과목마다 하얗게 쥔 주먹을 보였어. 종례시간이 될 때까지, 손을 들어도 나는 발표할 수 없었지. 오줌을 쌌다. 이건 발표가 아니라 발악이었는데. 축축한 바지는 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집에 들어간 날. 어미의 표정. 팬티가 왜 그렇게 누렇냐. 중얼거리던 어미를 보고 난 처음 "죄송합니다."라 했었고. -내일, 머리를 밀어버리고 손을 들었다. 한여름 쨍쨍한 햇빛이 아이들의 하얀 실내화 위로 떨어지던 날. 나는 대사를 읊듯 선생님을 부르고. 큰 목소리로. 우람해진 얼굴로 이마를 빛내면서 계속 시도했다. 땀은 새로 산 바지까지 적신다. 또 팬티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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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5
언제까지 슬플 것인가. 눈물에 얼굴 비추는 일 없기를 바랐는데. 요즘 날씨가 좋다. 아니 따뜻하다. 하늘은 흐리지만 기운이 오른다. 곧 짜증지수도 오를 테지. 그럼에도 서로 껴안으며 입김이 머무는 품 안에서 웃는다. 저들은 광장에서 웃을 수 있다. 요즘 좋은 것을 먹는다. 약 같은 게 아니라. 오로지 채소. 적당한 버터와 달큼한 조미료. 먹으면서, 씹고 열심히 뭉개고서 몸 안으로 집어넣는 일. 서랍 속에 괜찮은 옷가지를 넣어두듯이 안을 꾸민다. 나는 건강해질 것이다. 분명 조금이라도 아픔에 쉬이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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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가 계속되는 세계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빈손손바닥 위로 침을 뱉는 어미빠루를 휘두르는 가여운 동생설마 나에게 보낸 건지 싶은 분홍색 봉투의 러브레터십 년 후에 이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싶은 예상 가능한 죄거리에 멈춰 선 사람들우린 언제부터 같은 표정을 가지게 된 걸까날파리떼처럼, 하찮게 나타나 귓가에서 악몽을 퍼트리는 비 그래서였을까.가끔, 울음의 이유를 찾지 못해더욱 울어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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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생활
금기생활 누구나 자신만의 터부가 있지. 노란 손을 가진 동생은 남 앞에서는 절대 손을 펼치지 않았다. 손금이 없는 손. 색이 있는 손. 어쩌지? 나는 그런 동생이 부러웠거든. 넌 색이라도 있잖아. 나는 무색과 무취. 우리 둘이 진열되어 있다면 동생은 마이너 셀러가 되고 나는 그냥, 무색과 무취.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혀도 전혀 미안하지 않는 존재.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나의 터부. 절실한 가사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 따위 다 좆까라그래. 라고 저주하는 것도 나의 터부. 불편한 사람 앞에서 웃는 것 또한 터부. 동생을, 이름 붙여 부리지 않는 것. 야.라고 부르는 것. 기도하지 않는 것. 편의점에서 5분 이상 있지 않는 것. 벌레는 반드시 죽이는 것. 거미는 예외인 것. 해피엔딩인 드라마는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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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4
-5월은 행복한 만큼 불행했다.그나마 다행인 것이 플러스마이너스제로라는 것.남아 있는 것 없어서 앗아간 건 없었다6월이 어서 왔으면. 월급날이기도 하고, 좋은 것을 먹고, 저금도 하면서. 몇년만에 만나게 되는 소중한 사람들이 보고 싶다. 어서. 어서. -다음주에는 책을 착실하게 읽어보려고 한다. 글 쓰는 건 조금 자제하고. 감정과 감성 정리를 좀 더 하고서. 빳빳한 세탁물이 되어가지고, 나도 좋고 당신도 좋아할 글을 썼으면 좋겠다. -일조권을 침범하는 50센티 떨어진 옆 건물 공사장 때문에 스트레스 였는데. 요즘은 쌓아올려지는 건물을 보며, 오구오구 오늘도 저만큼 자랐구나 하는 헛소리를 한다. 이젠 그냥 정겹다. 대신 암막 커튼을 사던지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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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 11층
-오피스텔 11층 기억이 만든 창, 열면 항상 시인이 있고. 나는 말한다. 떠올린 제목 하나와, 안녕을. 시인은 기억 중 인간이 지닌 가장 조용한 표정을 짓고. 천천히 들어 올리는 손. 창가로 다가오지 않고 풍경과 섞이면서. 마치 녹아가는 아이스크림 같아지는 시인의 존재. 따스한 호흡 한번 제대로 못하고 지켜보게 되는. 저 달콤하고 차가운 세계가 부러웠어. 다시 한번, 시인의 안녕. 만남에 대한 인사가 아니다. 떠남에 대한 인사가 아니다. 이리 어서 오라는 인사 받아들고. 나는 인정한다. 저 시인의 문장을. 고통으로부터 훈련된 날카로운 몸뚱이. 교미하지 않아도 진행되는 생명. 나도 당신처럼 무지개가 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창문을 열어 곧, 뛰어내린다. 죄책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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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방
부드러운 방 /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천장의 무늬 중 하나가 이마를 맞댄다. 우리도 그래. 나도 모르게 웃었지. 그랬구나, 하며. 날 좋아했구나. 그늘을 가볍게 만들고, 진한 햇살을 일부러 거울에 반사되도록 했구나. 빛났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 바라본 내 방이. 너무다 밝아서 행복했지. 이게 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구나. 나는 또 웃고 말았다. 몸을 비틀며 엉엉, 울 때면 일부러 밖의 소음을 끌고 와 내 우는소리를 옆방에 들리지 않도록 했지. 유난히 크던 개 짖는 소리와 갑자기 불행해진 신혼부부의 고성이 내 고통을 덮어 씌웠지. 고마웠어. 나는 습기에 부르튼 하얀 벽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바르르 떠는 건. 근처 대단지 아파트 공사장의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 너는 나를 정말 좋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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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3
-당신도 철부지였다. 철부지로부터 태어난 나는, 가감없는 철부지. 철딱서니 없는 새끼. 다행인가싶다. 당신을 닮아서. -6월엔 영화에 빠져살까. 미뤄뒀던, 보고싶은 영화가 많다. 보고나서 공원 어딘가에 너부러져 멍하니 곱씹고 하고 말이야. 허물없이. -김애란 작가가 좋다. 김애란스럽다. 라는 것도 좋고. 김애란처럼말하다.도 좋다. 나는 가지지 못한 것들. -친절하고 싶은데 힘들다. 삶이 그리 내버려 두지 않는다. -좌절은 절망을 카피한. 그 카피도 어설프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좌절한 사람은 절망한 사람의 상처를 절대 모를 것이다. 그냥 모르고 살았으면 하지만. -좌절곱배기.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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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2
-우리가 불협화음인 이유는 너무 다감해서 그래네가 함부로 나를 빛나게 해서나는 가는 시선으로 네가 꾸민 방을 바라보고어여쁘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지수목원에서 외쳤던 말내가 너의 취향이었으면 좋겠습니다전혀 플라토닉은 아니었지그래서 넌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고 내 고백을 들은 식물이 잎과 뿌리를 부르르 떨었다고 그랬잖아지금 우리가 뒤엉켜 자라는 것처럼사십분 뒤, 우리는 하나의 정문으로 걸어 나왔지 하나의 생물처럼적당히 안타까워하면서적당히 공동체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여인숙에서 만난 당신들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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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데이
썬데이 강아지 꼬리의 하찮은 움직임.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밤, 별이 참 예쁘지? 라 묻는 도시남녀. 화면 속, 경주마 썬더는 레이스 중 미끄러지며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3번 마에 걸었던 인간들의 비명. 내 돈이! 내 돈! 티브이를 보다가 칭얼거리며 끈다. 똑같은 리모컨을 소파 밑에서 찾았지. 가계부엔 '건망증 오천 이백원'이라 쓴다. 그런 일요일. 전화가 왔고, 할머니(아흔두 살)였다. 뭐하고 사냐? 라 묻길래, 시를 쓰고 있어. 거짓말한다. 울고 있냐.라고 묻길래, 아니야. 거짓말한다. 전화를 끊고 침묵하는 겸, 방안을 산책했지. 산책이 지겨워지면 인적 드문 골목처럼 나는 처량하게. 거울이 비치지 않는 구석에 서서, 하찮게 어깨를 들썩여. 개 꼬랑지보다 귀엽지 않은. 아무도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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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001
-단어를 모은다. 영원히 해야할 일 이다.좋아하는 애니나 영화를 잔뜩 봐야지. 다가오는 주말을 계획하며 빙그르르,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잔뜩 맛있는 카레를 먹고서, 빵빵해진 배 두드리며.하루 중 십 여분간 행복하다. 나머지는 좌절, 좌절, 좌절. -오늘 하루, 자알 시들었다. 라 쓰고나서 고개 꺾었다. -써야지. 마냥 햇빛을 따라가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쫒는 꽃처럼. -실내가드닝을 해볼까. 본격적으로. 토마토나...토마토나, 토마토나. 아, 허브도 괜찮다고 했었지. 좋을 걸. 생명력 넘치는 걸 곁에 두고 싶다. 나는 좀 죽어가는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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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작명
사소한 작명 모른다, 잘 모르니까 굳이 이름 붙여 사랑-이라 하는 걸지도 몰라. 심장이 우주 끄트머리에 던져져서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것. 서서히 호흡이 가늘어지는 것. 조용히 스미는 순간을 사랑이라 하는 걸지도. 당신이 슬픔과 눈물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니까,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것. 꿈에서 만난 것처럼 사소한 잔상에 의미 두는 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니까, 그냥 그걸 사랑이라 하는 것. 어머니가 들꽃을 찍은 사진과, 아버지가 일군 채소 수확물을 보고 더 이상 울지 않으려, 입술 꾹 쥐는 것을 일컬어 사랑이라 하는 것을.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 이 얄미운 인간들. 마구잡이로 붙여진 단어에 온통 맘 빼앗기고, 우리는 어여쁜 새끼가 되어 또 사랑. 초라한 웃음에도 그 주름 귀엽다며. 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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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문제
늙은 문제 / 새벽 술상을 마주하고서, 노친네 기침에게 묻는다. 보호구역이 없는 삶. 어떠하냐고. 뺨에 길게 베인 자국. 늙을수록 주름보다 선명해지는 상처. 이제는 부끄럽지 않냐고. 노친네는 고개를 가로 젖는다. 부끄러운 것보다 무의미해진다고. 술잔이 채워지길 기다리던 젊은 날. 술잔이 비워지는 대화를 기다리는 나날이 된 지금. 다 무의미하다고. 노친네, 쩍쩍 갈라지는 마른 나무껍질처럼. 힘없이 백반집 테이블 위로 쓰러진다. 정수리에서 풍기는 조용한 악취. 나이 사이사이마다 영글어버린 죄목들. 이걸 다 어찌하냐며. 그래서 대가리가 무거워지니까. 나이 들수록 테이블 위로 쉬이 쓰러진다는 노친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술잔에 독한 술을 채워주는 것뿐. 천천히 대가리를 드는 그의 추잡한 입이 간신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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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 리스트
서치 리스트 / [너무 행복해서 무서워요]를 검색하는 사람[오늘 당장 죽고 싶다]를 검색하는 사람벌써 더워. 중얼거리며 등에 난 땀에 달라붙은 블라우스를 떼어내는 사람앞서 계단을 오르던 노인을 앞지르며 나는 아직 괜찮다고 인정하는 사람새끼손가락에 맺힌 생크림에 기뻐하는 사람전신을 빡빡하게 채우는 아우성에 불행한 사람찌그러진 금색 안경테를 쓰고 있는 사람잠들지 못한 저녁을 위해 낮 동안 기력 없이 지내는 사람새로 산 책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쓰레기통에 있던 책을 집어 들어 읽는 사람노래 부르는 사람귀를 틀어막는 사람전력으로 뛰는 사람뒷걸음질 치며 울음을 참는 사람 지하철을 세 개나 그냥 보낸 채로당신들을 본다나도 가끔 당하는 판결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벤치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점점 희미해지는 낱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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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꼬리 / 죽어버려 한심한 사람들상경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수도 없이 되뇐다그곳에만 가면, 몸속에 사육하고 있던 감정들의 이름을 겪는다멀어지는 차창의 풍경 속, 당신은 계속 손을 흔들었다나는 또 피치 못할 짐승을 기르고 눈물을 먹인다부모 앞에서만 진지해지는 인생내 것이 아닌 것을 드러낸 것 같아서 한없이 부끄러운데책을 들었다읽고 책장을 넘긴다고속버스는 흔들렸다운전 습관이 고약한 운전수고속도로 뽕짝에 맞춰 입을 벌렸다 다문다불결한 노랫말나는 이제야 그 가사를 이해하게 되었지차가운 유리창에 관자놀이를 맞댄다도마뱀이 살기 위해 꼬리를 자르는 것처럼어미와 아비는 꿈틀거리는, 내가 남겨놓고 온 꼬리를 바라보며 서글퍼졌고수백 명의 살냄새가 섞인 버스 속에서뭉특한 꼬리뼈를 비집고 자라나는 또 하나의 꼬리별안간, 전화가 ..